누가 저녁을 불러냈나요?
정혜선
저녁은 벌써 가고 없군요
신던 양말을 소파 밑에 벗어 놓고
기름 낀 하루를 구정물에 불려 놓은 채
어질러진 식탁 위로 허물어진 저녁은
물의 얼룩만 남기고 갔네요
온종일 나는 저녁 향해 저물었는데
캄캄해진 두 손으로 투항하듯 보듬는 어스름
백지 위로 몰려드는 우두커니를
흘려 써 주길 바라요
가스레인지의 파란 불꽃에 정신이 팔려서예요
뜨겁게 일어나는 휜 문장을 언뜻 읽어낼 듯도 했는데
냄비 뚜껑을 밀고 올라온 하얀 수증기로 푹푹 마음만 자욱하고요
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지만 내 이름을 부른 사람은 없어요
차를 마신 후 잔에 남는 찻물 자국으로 미래를 읽는 점쟁이가 있어요
어제 집어삼킨 시간을 오늘 토해낸다 해도 쏟아지는 문장은 새것이 아닌데
Where, am, i……
손가락으로 넘는 영속의 국경선
식탁 위엔 또 한 번 물컵이 엎어지고
말갛게 저녁은 가고 없어요
낯설기로 작정한 사람이 되어 물의 질주를 지켜봅니다
Comentarios