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고장 난 밥통/권향옥

작성자 사진: 정혜선정혜선

고장 난 밥통

권향옥


부엌 귀퉁이에 동그마니 앉아있는 고장 난 밥통

벌써 엿새째 저러고 있다

십수 년 전

옅은 미색 예쁜 자태로 우리 집에 처음 와서

완두콩밥 강낭콩밥 현미밥 번갈아 가며

하루도 빼놓지 않고 묵묵히 따스한 밥 지어 먹이며

무한한 사랑을 나눠주던 너

어느 날부터

푹 푸욱 깊은 한숨 뿜으며 고뇌도 하고

삑 삐익 못 견디겠다고 고함도 지르며

막힌 숨구멍에 답답해 눈물도 흘리고

생쌀을 보이며 데모하더니

드디어 조용히 멈춰버렸다

분신처럼 함께한 긴 세월

고장 난 너를 버릴 수 없어

나는 아직도 구석에 너를 간직하고 있다



매일 버리라고 성화하는 남편

그러나 오늘도 주저하는 나

매일 아침 약으로 하루를 여는 내게

오늘 네가 조용히 말했다

이제 그만 가야지

조회수 32회댓글 1개

1 Comment


송윤정
송윤정
Feb 20, 2024

저도 그렇게 버리지 못하고 갖고 있는 게 많아 남편과 아이들은 저를 "hoarder"라고 놀리기도 합니다. 😄 동지를 만나 반갑습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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