고장 난 밥통
권향옥
부엌 귀퉁이에 동그마니 앉아있는 고장 난 밥통
벌써 엿새째 저러고 있다
십수 년 전
옅은 미색 예쁜 자태로 우리 집에 처음 와서
완두콩밥 강낭콩밥 현미밥 번갈아 가며
하루도 빼놓지 않고 묵묵히 따스한 밥 지어 먹이며
무한한 사랑을 나눠주던 너
어느 날부터
푹 푸욱 깊은 한숨 뿜으며 고뇌도 하고
삑 삐익 못 견디겠다고 고함도 지르며
막힌 숨구멍에 답답해 눈물도 흘리고
생쌀을 보이며 데모하더니
드디어 조용히 멈춰버렸다
분신처럼 함께한 긴 세월
고장 난 너를 버릴 수 없어
나는 아직도 구석에 너를 간직하고 있다
매일 버리라고 성화하는 남편
그러나 오늘도 주저하는 나
매일 아침 약으로 하루를 여는 내게
오늘 네가 조용히 말했다
이제 그만 가야지
저도 그렇게 버리지 못하고 갖고 있는 게 많아 남편과 아이들은 저를 "hoarder"라고 놀리기도 합니다. 😄 동지를 만나 반갑습니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