전봇대
정혜선
한 아름 둘레 안에 갇힌 뒤론 수직만 생각했다.
전력을 다해 서 있는 일
개들이 갈겨주는 의리의 오줌을 밑거름으로
도시의 아우성이 밀어닥치는 복판에서
후퇴하지 않는 전사로 사는 일
피 흘릴 줄 모르는 나는
갈증에 겨운 태양이 머리꼭지를 눌러도
어퍼컷으로 덤프트럭이 아래턱을 후려쳐도
싱싱한 자동차 매연을 휘감아 곧추 수직으로 들이박았다
들이박는 일만 생각했다
그 밤 느닷없는 포옹에 사로잡히기 전까지는
팽팽해진 밤공기에 전신줄이 곤두서는 고통 속
누군가 차가운 내 몸에 머리를 놓고 괜찮다, 괜찮다 기도문을 읊어 주었다
무너지고 성내고 곤죽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차례차례
내 발에 입 맞추었다
오렌지환타가 흘러 개미행렬이 지나던 자리가 성지순례의 길이 되었다
밤의 무늬가 선명하여 나는 절로 전신(傳神)이었다
정혜선님,
초록엄지 그리고 화장지의 말을 잘 읽고 갑니다. 명주수건에 숨겨서 전해 준 홍시같이 맛갈난 시어에 몇번이고 거듭 읽었습니다.
강혜옥